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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z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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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식: 레이어 세트 플레이»
2015. 5

최현우, 39세, 남

폴리텍 대학이요. 반짝이던 파도에 다가가 있다가 후다닥 운전대로 돌아왔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불콰한 얼굴의 30대 초반의 남자가 뒷좌석에 거칠게 올라탄다. 승객이 목적지를 폴리텍 대학이라고 말하면 그는 난감하다. 강서? 성남? 아주 잠시 추리를 하는 사이 남자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디밀었다. 정수캠퍼스로 가주세요. 보광 나들목 지나서요. 남자는 취기가 도는 듯 이내 눈을 감는다.
남자의 목에 걸린 붉은 헤드폰 사이로 정신없는 타격음이 새어 나온다. 가로등은 아직 4분의 3박자로 차창을 두드린다. 한남대교를 건너며 잠시 귀가 동선을 생각해본다. 다행히 집에는 3시면 도착할 것 같다. 이 청년을 데려다주면 오후에 도착한 소포를 끌러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우표를 색깔 별로 갈무리한 책과 일본의 작은 접시를 모아놓은 사진첩을 샀다. 전용 책장에 꽂혀 그를 대단히 만족시킬,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가 이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을 사보기 시작한 때는 택시 기사를 시작하고 2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리는 계절이었다. 계산을 하고 금호동의 가파른 고개를 내려가는데 뒷좌석 바닥으로 무엇인가 굴러떨어졌다. <πέτρα> 다음 손님이 바로 타는 바람에 돌려주지 못한 책의 제목이었다. 계기판 위에 올려둔 채로 몇 주를 보냈다. 직사광선에 표지가 노랗게 익어버린 후에야 그는 그 작은 중철책을 펼쳤다. 같은 지층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회갈색 돌 수십 점을 아주 세세하게 그렸다. 설명도 없이 한 페이지에 돌 하나씩 정갈히 올려져 있었다. 둥근 것. 모난 것. 깨진 것. 작은 얼룩이 있는 것…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 썰어놓은 인절미같이 네모 둥글하고 길쭉한 모양새였다. 마지막 장을 보고 나서야 그는 80여 개의 돌들이 스톤헨지를 이루는 열석 하나하나를 그린 것임을 깨달았다. 그저 주먹만 한 돌멩이인 줄 알았는데, 한 페이지가 50톤이었다.
삼거리서 좌회전이던가. 깜빡이를 넣으며 그는 50톤의 돌을 움직이는 힘은 기쁨보다는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직진. 그는 고인돌을 닮은 저것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분명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산 자들의 것은 죽은 자의 것보다 언제나 무거운 법이지. 기사 식당에서 본 다큐에서는 스톤헨지 근처에 우드헨지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돌보다 가벼운 나무는 죽은 자의 것인가? 나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을 기원전에 죽은 고대인을 상상한다. 한창 건설 중인 서빙고 고가도로를 지나치며 몇 천 년 후의 인류도 저 고가도로의 일부를 보면서 죽음이니 삶이니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몇 번을 부른 후에야 눈을 뜬 청년이 비틀거리며 내린다. 잔돈은… 괜찮아요. 이백 원을 거슬러 주려고 보조 등을 켰다가 이내 끈다. 담배를 태우러 잠시 대학 입구에 차를 댄다. 야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요란하게 정적을 깬다. 저만치 버스 정류장 벤치에는 외국인 남녀가 말도 없이 부둥켜안고 있다. 모퉁이의 마트는 24시간인지 여전히 형광등이 시리다. 반쯤 태웠을까. 베이지색의 코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와 차 옆에 서서 빤히 그를 쳐다본다. 빈차 등을 끈다는 것을 깜박했다. 급하게 담배를 비벼 끄고 운전석에 올라타 백미러로 40대 남성의 인상을 살핀다. 어디서 본 것만 같다. 체부동으로 가주세요.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말한다. 오늘의 귀가는 더 늦어질 것이다.

김규태, 28세, 남

규태는, 검은 표면 정중앙에 과도를 넣는다. 둥글게 한 바퀴 돌리고 살짝 비틀어 씨앗을 꺼낸다. 과육을 수저로 잘 파낸 다음, 레몬즙을 조금 넣고 포크로 잘 으깨어 토스트에 바른다. 한 입 먹다가 내려놓고 창가 근처로 간다. (스쿠텔라리아 잎이 말랐다. 이사 온 집은 간유리가 없어서 오후 직사광선이 그대로 들어온다.) 손톱에 힘을 주어 시든 잎 하나를 따내어 틸란시아 옆에 놓는다. 식탁으로 돌아가 남은 토스트를 마저 먹는다. 시선은 아보카도 씨앗에 계속 머물러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찬장에서 이쑤시개를 꺼낸다. 씨앗을 굴려 여러 번 위아래를 확인한다. 얇은 겉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내고, 삼각형 모양으로 이쑤시개를 단단히 꽂아 넣는다. (이쑤시개는 씨앗이 물에 반쯤만 잠기도록 지지대 역할을 해준다.) 이가 빠진 컵에 적당량 물을 담고 씨앗을 올린다. 창가로 가져가 3년 정도 기른 리톱스 옆에 둔다. (4주에서 8주가 지나면 아보카도 씨앗은 리톱스의 발굽 모양처럼 벌어지고 사이로 뿌리가 나올 것이다.) 견출지에 오늘 날짜를 쓰고 컵에 붙인다.
규태는, “맹독” 폴더를 클릭한다. (촬영은 광릉숲에서 했다.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필요한 개체 모두를 촬영했다.) 수백 장의 사진을 재빠르게 훑는다. 발광하는 화경버섯에 이르러서야 스크롤을 멈춘다. 한참을 보다가 파일 번호를 수첩에 적는다. 그런 식으로 붉은사슴뿔버섯, 개나리광대버섯, 두엄먹물버섯 사진을 선택한다. 골라낸 사진을 정리해 화가에게 메일로 보낸다. 기지개를 크게 피고는 미지근한 오렌지 주스를 마저 마신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일러실로 향한다. 플라스틱 원예자재함에서 모종삽과 작은 갈퀴를 꺼낸다. 전 세입자가 두고 간 나무 테이블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4년생 화보 철쭉을 화분 째 올려놓는다. 화분 옆구리를 충분히 두드려 흙과 뿌리를 단번에 꺼낸다. (철쭉은 8월 말에 분갈이를 해주면 발근이 빨라 생장에 도움이 된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갈퀴로 조심스레 흙을 떼어낸다.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스프레이로 여러 차례 수분을 충전해 준다. 주황색 토분에 그물망을 넣고 작은 돌멩이를 깐다. 화분에 준비한 흙을 조금 채우고 정리한 철쭉을 중앙에 놓는다. 남은 흙을 고루 채우고 판판하게 다진다. 베란다로 가지고 나가 물을 흠뻑 준다. 
규태는, 스탠드를 키고 빈 B4 용지를 한 장 꺼낸다. 왼쪽 구석에 한 남자의 이름을 적고 한참을 기다린다. 손을 모으고 구부정하게 앉아있다가 눈을 감는다. 그러다 문득 펜을 들어 편지를 쓴다. (할 말은 점점 많아져 글씨는 점점 작아지고 행간도 좁아진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고 다 쓴 편지를 읽어보려다 그만둔다. 반으로 접고, 한번 더 접어 노란 봉투에 넣는다. 미닫이를 열고 베란다로 나가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한 토막의 붉은 한강을 응시한다. 시추의 똥을 정성스레 봉지에 담는 아저씨를 보고 조금 웃는다. 열한 개의 숫자를 눌러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는 사이, 쪼그려 앉아 분갈이 한 철쭉의 상태를 살핀다. (조금 시들했던 이파리가 다시금 생생해졌다.) 침대에 눕기 전, 제법 무게가 나가는 황동 문진으로 편지를 눌러 놓는다. 조금 열린 창문을 닫고 이내 불을 끈다.

이두호, 33세, 남

“감자튀김 대령이요. ———— 짠부터 할까? 짠. — 마요네즈에 식초 안 넣었네. 거기 냉장고 위에 식초 있어. — 뿌연 거. 응. 그거. ——— 이거? 구정 때 집 내려갔을 때 가져왔지. —— 글쎄. 서울엔 막걸리 식초 파는데 없을걸? 만들어 먹으면 모를까. ———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하던 거 봤는데 되게 복잡해. ——— 어렸을 때 되게 혼났던 거 생각난다. 막걸리 식초는 다 담그고 나면 천으로 만든 뚜껑을 덮어. 그리고 그 위에 십 원 몇 개 올려놓거든. —— 동전이 푸르스름해지는 거 보고 식초가 잘 되었나 안되었나 가늠하는 건데. 그거 있잖아, 하나에 십 원짜리 땅콩 캬라멜. 그거 사 먹는다고 가져가서 엄마한테 엄청 혼났지. ——— 우리 집에선 항상 막걸리 식초만 쓰고 다른 건 안 썼어. — 대학 다닐 때 방학에 집 내려가면 할머니가 요거 넣어서 서대회무침 해주면 진짜 꿀맛이었는데. — 어렸을 때는 생선맛을 잘 모르겠더니 서른 찍으니까 입맛도 변하나 봐. 가끔씩 사무칠 때가 있다니까. —— 한 번도 안 먹어봤어? 그럼 여름에 같이 남도 가자. 내가 쫙 구경시켜 드릴게.” 
“이번 달? 진짜 박 터지더라. —— 요즘 오너가 자꾸 외국에서 데려오는데. 시발. 지난 주말에 들어간 것도 병국 형이 밀어 준 거지. 재현이는 개털이라 끼지도 못해. —— 다른 데 좀 뚫어 봐야지.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편하게 생각하려고. 이러다가 보증금 다 까먹는 거 아닌지 몰라. 허허 ——— 자기야. 나도 당연히 알지. 장비 할부는 드디어 다음 달이면 끝나긴 해. —— 네 말이 맞아. 그러긴 한데. —— 아냐. 좀만 더 고민해볼게. 병국 형도 나 부스 올라가면 관객 분위기 좋대. —— 이 바닥에서 3년 차면 아직 애기지 뭐. 근데 나도 아부지랑 엄청 싸워서 시작한 거잖아. 이제 좀 뭐가 보이는데 그냥 접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 구정에 내려갔더니 팔에 문신한 거 누나는 처음 본 거야. 큭큭큭. 완전 소리 지르고 장난 아니었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고. —— 가끔씩 아부지보다 더하다니까. 그래도 저번처럼 삐끼라고는 안 하더라고. —— 다 마셨어? 캔 맥 하나 더 할래?”
“알잖아. 나 다른 요리는 못해. — 어쩌지? 호식이두마리 시킬까? 남으면 내일 아침으로 먹지 뭐. 양념치킨은 밥에다 먹어도 맛있어. —— 내가 말 안 했어? 이사 갈까 봐. 성수동으로. ——— 맞아. 이태원 멀어져서 좀 그렇긴 한데, 거기도 영동대교 건너면 강남 가까워서 괜찮은 거 같아. —— 재현이가 보증금 대고, 내가 월세 칠만 원 더 내기로 했어. —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잘 됐지 뭐. 공부도 하고. —— 지금처럼 편히는 못 오겠지. 그 대신 내가 목동으로 자주 갈게. 2호선 타면 금방 가. — 치킨 왔나 보다. ——— 이번 주에 대충 짐 정리하려고. 버릴 건 버리고 단출하게 들어가야지. 어차피 방도 작아서 지금처럼 못 쓸 거 같아. ——— 세탁기랑 냉장고 해서 십만 원에 두고 간다고 피터팬에 올려놨어. — 이 상도 정들었는데 두고 가야지. —— 이사하고 집들이 조촐하게 해야지. 재현이도 여친 부른다고 했어. 넷이서 술 한잔하면 되겠다. —— 그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그때 가서 이야기 더 해보자. ———— 벌써 열두 시가 넘었네. 자고 갈 거야?”

서승호, 43세, 남

채색 과정에 들어가면 나는 몹시 예민해진다. 자칫 조금이라도 어둡거나 탁한 색을 칠하게 되면 결코 덧칠로 만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색을 허용한 그림에서는 언제나 구린 맛이 났다. 가리왕산에서 채집해 온 선메꽃 이파리의 잔털을 그리고 있던 차였다. 같이 산행을 갔던 보조 녀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신경이 쓰였다. 정신을 집중하려고 물을 끓였다. 평소에 향이 진한 차나 커피는 최대한 자제했다. 채집한 식물의 향은 비누나 치약 냄새에도 쉽사리 묻히기 때문이다. 향(혹은 냄새)은 대상의 묘사에 반드시 필요하다. 후각을 활용한 그림은 문자 그대로 코앞에 두고 감상해도 즐겁다.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은 그렇지 않다. 물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릴 무렵, 한 여성이 작업실로 전화를 했다. 모 잡지의 피처 에디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곧 출간될 책의 제목을 들먹였다. 나는 편집자와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보시라고 말을 돌렸지만 눈치가 빠른 그는 세밀 화가에 대해서 다루고 싶다며 말을 정정했다. 능청스럽지만 어딘가 모르게 세련된 목소리에 호기심이 일어 그만 허락하고 말았다. 이레 뒤 시원한 인상의 한 여성이 문을 열었다.  
에디터는 호기심이 가득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작업실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작은 탄성을 내지르는 표본들은 주의를 기울인다면 산책길에도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물 찾기라도 하듯 작업실을 꼼꼼히 살피자 나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이윽고 액침 표본을 진열해 둔 유리 캐비닛을 열었을 때 나는 그녀를 제지해야만 했다. 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염소 울음 같았다. 메… 메밀차 괜찮으시죠? 서랍을 뒤져 티백을 찾아냈다. 작업실의 선이 더 이상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서둘러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었다. 스케치를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낮은 책상에 그녀와 나는 마주 앉았다. 보통 이렇게 탐색부터 하시나 봐요? 하하하. 제가 호기심이 없었다면요, 이런 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식물에 관심이 많으신 거죠? 최근에 꽃나무 몇 개를 선물 받았어요. 아직까진 생생하답니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뒤바뀐 채 허공을 가르는 질답들이 오갔고 나는 점점 괴로워졌다. 찻물의 상아색이 충분히 짙어진 후에야 그녀는 준비해 온 질문을 시작했다. 식물을 그리는 다른 화가들도 많다. 세밀 화가가 기존의 화가와 다른 점은… 드로잉의 대상을 식물로만 한정하는 이유는… 자생지에서 직접 표본을 구해서 그린다고 들었다. 표본을 구하는 방법은… 스케치와 채색의 단계는… 열 개 남짓한 질문에 충실히 답하고 나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입은 마르고 눈 뒤가 아찔했다.  
그녀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서랍에서 그림을 꺼내 테이블 위에 차례로 늘어놓았다. 가리왕산에서 채집한 표본들로 구성된 곧 출간될 책을 위한 그림들이었다. 그녀가 투구꽃을 가리켰다. 꽃잎 모양이 그리스의 고대 투구 같네요. 독특하죠? 투구꽃은 독성이 있어서 사약의 재료로 쓰였답니다. 이 부분은 뭐랄까, 마치 컴퓨터 그래픽 같아요. 이렇게 깊은 보라색을 얻으려면 여러 번 덧칠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붓 자국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죠. 그녀는 열네 장의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돌아갔다. 에디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고, 나는 경미한 두통으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름답지만 어딘가 피곤한 여자였어. 너무 말을 많이 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멀리서 조약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역광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 한 올이 주목나무에 걸려 있었다.망설이다 손을 뻗어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 순간 삵 똥에 앉아있던 은판 나비 무리가 후드득 날아올랐다. 배 위로 무엇인가 툭 떨어졌다. 깻망아지였다.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었다.

임민아, 29세, 여

언니, 저 민아예요. 건강히 잘 지내죠? 저도 별일 없이 잘 지내요. 저 이직했어요. 출판사 지난달에 그만두고 문구 회사에서 일해요. 졸업하고 5년간 붙박이였잖아요. 옮긴 데는 친구 선배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회사인데 빡세지 않아서 좋아요. 참, 지난달 마침내 퇴직금으로 여행 다녀왔어요. 일주일만 후다닥 다녀오자 싶었는데 보름 넘게 나가 있었어요. 출판사 동기가 알려준 대로 터키에서 일주일 있다가 보드룸에서 그리스로 넘어갔거든요. 갑판에 서서 지중해의 반짝이는 물결을 보고 있자니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 있죠. 그러다가 언니가 추천해 준 책이 딱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정확한 문장은 생각이 안 나는데 이런 내용이었어요. 조르바, 키스할 동안 딴 일은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지옥철 타고 다니면서 이 문장을 얼마가 되뇌고 다녔는지 언니는 모를 거예요. 
너무 아쉽게도 비수기라서 크레타 섬까지 넘어가는 페리가 없대요. 저 그래서 코스 섬에만 계속 머물러 있었어요. 거기가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이래요. 힐링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근데 숙소는 적막하고 밥 먹으려고 광장이라도 나가면 동양인은 저밖에 없는 거예요.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첫 해외여행이라 아직 내공이 부족했나 봐요. 선글라스 너머로 모두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러운 거 있죠. 날이 계속 좋아서 해안을 혼자 많이 걸었어요. 첫날은 요만큼. 다음 날은 조금 더. 그렇게 걷다 보니 떠나기 전날은 어떤 호수까지 걸어가게 됐어요. 언니. 제가 거기서 뭘 봤는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그건 홍학이었어요! 저 멀리 무리가 있었고 한 마리가 홀로 떨어져 나왔더라고요. 그 붉은 새는 해변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바닥에서 먹이를 찾다가 이따금 제 쪽을 보기도 했어요. 그 초현실적인 장면은 아름답기보다 충격적이었어요. 한참을 넋 놓고 보다가 더 늦으면 돌아갈 길이 무서울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모래를 털고 일어섰는데 그날이 엄마 기일인 걸 그제야 깨달은 거예요. 언니, 밀린 눈물이라도 갚는지 그 자리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장례식장에서도 잘 나오지 않던 눈물이 딴 나라에서 펑펑 나오는데, 제 자신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게 또 슬퍼서 더 운 거 있죠. 이 이야긴 그만할래요.
언니, 눈 펑펑 쏟아지던 그날 기억나요? 먹지도 못하는 와인 언니가 산다니까 괜히 마셔서 완전히 필름 끊긴 날이요. 눈 떠보니까 언니는 그새 일어나 아침 차리고 있었어요. 고소한 토스트 냄새를 맡으면서 한참 이불을 휘감고 방 구경을 했었어요. 창문 아래에 특이하게 생긴 선반이 있더라고요. 선반에는 언니가 외국 친구에게 받은 엽서, 직접 찍은 게 분명한 사진, 손바닥만 한 책들… 그리고 작은 돌멩이들이 놓여 있었어요. 언니, 참 이상해요. 저는 그 선반을 보면서 몹시 질투가 났어요.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좋은 취향을 가지고 있을까. 제가 가진 한 뭉치의 취향으로는 방패를 닮은 그 선반을 평생 뚫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언니, 이제야 털어놓지만 그때 선반에 있던 제일 작은 돌멩이 하나를 훔쳤어요. 그때는 그걸 가지고 돌아가면 나도 언니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뭐예요. 술이 덜 깼던 게 분명해요. 며칠 뒤에 돌려드리려고 외투 주머니를 뒤졌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화장을 지우다가 언니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한 건데 느닷없이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근데 엄마와 닮은 콧볼을 클렌징 오일로 막 문지르다가 “촌년이 어때서…”라고 중얼거린 거 있죠. 옛날엔 롱 코트와 무채색 옷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저한테는 파란색이 잘 어울리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언니, 편지가 너무 길어진 것 같아요. 여행할 때 찍은 사진 몇 장이랑 노트 한 권을 같이 보내요. 실장님이 제가 여행 때 그렸던 그림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이번 표지에 넣자고 하셨어요. 이 노트 언니가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편지 쓰기 전까지만 해도 이 노트가 창문 아래 선반에 놓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에요. 가방에 넣고 자주 써주세요. 더러워지고 다 쓰시면 제가 또 보내드릴게요. 언니, 곧 여름이 되거든 우리 만나서 치맥해요. 그때까지 잘 지내요. 저도 잘 지낼 거예요.

leedoz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