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는 디자이너와 잡담을 나눴다. 그녀의 업무 시간에 불쑥 쳐들어간 터라 데스크 뒤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녀는 시답잖은 내 이야기에 응수하며 핀터레스트를 검색하고 있었다. 수많은 그래픽이 화면에서 롤링 되며 내 망막에 1초도 머물지 않고 사라졌다. 스크롤은 끝이 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봐도 더이상 멋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이것저것을 골라 보여주며 멋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것들은 멋이 있다가도 곧 사방에 떠 있는 주변 그래픽들에 파묻혔다. 그 이미지가 딱히 진부해서가 아니었다. 모두 멋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영영 모를 것 같았달까. 어쩐지 벼 이삭의 단물만 빨아먹고 뱉어버리는 멧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어제는 영화 <쓰리 빌보드>를 보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붉은 간판과 검은 글씨가 등장하자 내 머릿속엔 “무엇을”과 “어떻게”라는 두 단어가 가득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왜 존재하는지 영화 보기 직전까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테두리를 가진 붉은 색 간판, 검은 임팩트 폰트를 보며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저 이미지가 어째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지 알고만 싶었다. 나는 그 이미지를 이해하기까지 두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만 했다. 영화관을 나서며 어쩌면 망막에 1초도 머물지 않고 사라졌던 핀터레스트의 그 이미지들도 이렇게 오래 바라봐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과 끈기는 한정적이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세상엔 너무 많은 그래픽과 그래픽 디자이너가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할 무렵, 평생을 우려먹을 방법론을 획득한 이들을 동경했던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무슨 일을 하든 새로운 우물을 파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미련한 나보다 그들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느꼈다. 시간도 자금도 부족한 나에게 효율적인 공식이 있다면 아무래도 지금보다 나아질 거로 생각했으니까. 일은 없었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내 정체성은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두 단어로 전부 설명되는가? 그래픽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아니, 내가 할 이야기나 있던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버리면 나중에 망한다고 말하는 교수는 있었지만 네 이야기가 궁금하니 어서 해보라고 말해주던 사람은 없었다.
‘새로운 말하기 방식’(=“어떻게”)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은 멋진 일임이 분명하다. 더 다채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그래픽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이자 지향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어떻게”에만 천착하는 것을 나는 전통적이라고 느낀다. 디자인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의 정체성은 큐브로 깍뚝 썰기 할 수 없다. 어떤 디자이너는 굉장히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란 성소수자이자 아빠일 수 있고,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한 트랜스젠더 여성일 수도 있으며, 대학 교육에 실망을 느껴 졸업을 거부한 사십 대 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그래픽으로도 가능한 세계가 더 낫다고 믿는다. 또한, 이야기 그 자체가 그래픽 디자이너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중엔 진부하게 *보이는* 언어가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런 것도 없는 생태계가 가능하기나 한가?) 어쨌건 디자이너에게 “무엇을”과 “어떻게”는 배타적이거나 선후가 불변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과 맛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렁이 젤리처럼 적당하게 뒤섞일 수 있다. 나는 체득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디자이너들을 목격해왔다.
한 달 전 국민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 ‘오픈 페미니즘’이 전시를 할 수 있도록 프레클스를 내어준 적이 있다. 조형대학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그들과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전시 기획이 표류하고 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되물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디자인(을 초월한) 수업들을 빼곡히 적기 시작했다. 대자보 형식을 빌은 작업에서는 교수를 비롯한 남성들이 저지른 폭력 또한 빠트리지 않았다. 그 작업은 금세 사라지지 않고 내 망막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